어머님을 추모하며
사월의 어느 날이었지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날은
아직도 산등성이에 유채화는 하늘거리고
맑고 따뜻한 날 이었습니다.
일본치하의 어려운 시절에 태어나셔서
육이오를 치른 힘든 시대를 살아오셨습니다.
제게 빈 젖을 물리며
함께 울었다고도 하셨습니다.
노상 먹이 걱정만 하였었지요.
삶의 모든 염려를 놓으신 후에도
마지막까지 어머니를 붙드신 것은
자식들 배고플 걱정 이였습니다.
이제
그렇게도 사랑하시던
오빠와 저를 뒤로 하시고
홀연히 떠나신 어머님
50 이 넘은 내 얼굴을
그리도 쓰다듬어 주시던 따뜻했던 손길
벌써
그리움이 사무쳐 가슴이 멥니다.
그러나
지금은 버겁던 육신을 벗어나셔서
93세의 삶을 끝내시고
천국에서 평화롭게 쉬고 계시리라 믿기에
슬픔을 달랩니다.
오는 4월7일이면 엄마가 돌아가신 일년이 되는 날이다. 엄마가 미국에
오신 것은 1983년 봄. 내가 미국에 들어 온지도 10년쯤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많이 힘들어하시기에 막내딸집 구경이나
하시라고 모셔왔다. 날 보신 엄마는 많이 우셨다. 아이 셋을 혼자
키우는 것이 대견하면서도 불쌍하시다 하면서 자꾸 우셨다. 그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 20년, 오로지 딸의 육신을 편하게 하시려는 끈임 업
는 노력을 하셨다. 일 나갈 준비로 꾸물거리면 엄마는 내 점심가방
을 들고 차 문 앞에서 기다리곤 하셨다. 아이들 기르느라 밤일을
오래 했는데 오빠네 사시는 엄마는 30분을 걸어오셔서 내가 잠자는
동안에 부엌을 말끔히 치워 놓곤 내가 일어나기 전에 가셨다.
엄마는 차타고 시원한 바람 쏘이는 것을 좋아해서 내가 노는 날
이면 우린 언제나 차 속에서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오빠네 부부가 이민 왔을 땐 당연히 아들하고 사셔야 한다며
뒤도 안 돌아보고 보따리를 싸시던 엄마. 아이 셋 키우느라,
직장일 하랴, 남편 밥 해주랴 바쁘기만 한 나를 무척이나 그리워
하셨다. 아들 부부야 매일 보니 궁금한 건 딸. 딸이 와야 시장에도,
공원에도 가시고, 외식도 하실 수 있으니 매일 기다리셨다.
연금을 타시는 날에는 미국에 와서 이렇게 호강하시는 것이 딸 덕분
이라 하시며 한 턱을 쓰시곤 했다. 엄마는 미국을 참 좋아 하셨다.
편리해서, 깨끗해서 좋고, 수다스러운 동네 여자들 없어서 좋고
또 아들 딸 다 자가용이 있어서 타기만 하면 가니까 좋다고 하셨다.
내가 나이를 들어서 보니 엄마는 미인이었다. 얼굴도 예쁘시고,
깔끔하시고, 여성다우시고, 정이 많으시고ㅡ.그러나 쉽게 노여워
하시고 슬퍼하시고 쓸쓸해 하셨다. 난 엄마가 계신 오빠 집을
수시로 드나들며 엄마가 해 주시는 옛날 음식을 즐겨했다. 올케도
조카들도 별로인 그 어려웠을 때의 음식을 오빠와 나는 맛있게
먹어 엄마를 기쁘게 해 드렸다. 90 이 넘으신 후에는 차츰차츰
체력이 다 하여 정신도 오락가락 하시더니 오빠도 나도 알아보지
못 하셨다 그렇게 세상사를 다 내려놓으신 후엔 노래도 부르시고
춤도 추시고 항상 웃으시며 귀여운 할머니가 되셨다. 내 나이
50 이 넘도록 내 곁을 지켜 주시던 어머니 ㅡ.갑자기 돌아가시면
우리 두 남매가 힘들어 할까봐 3년이란 시간을 주셨다. 그리고
정말 조용히 애기 같은 얼굴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렇지만 내 마
음속에 계시는 엄마는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사랑 하신다.
나 또한 세 딸의 엄마이고 난 그들에게 어떤 엄마인지ㅡ.
엄마 사랑해요.